[詩] 내안의

그 깃발, 서럽게 펄럭이는 / 박정대

그믐애 2016. 3. 8. 18:10






그 깃발, 서럽게 펄럭이는

                                          박정대

 

기억의 동편 기슭에서

그녀가 빨래를 널고 있네, 하얀 빤스 한 장

기억의 빨랫줄에 걸려 함께 허공에서 펄럭이는 낡은 집 한 채

조심성 없는 바람은 창문을 마구 흔들고 가네, 그 옥탑방

 

사랑을 하기엔 다소 좁았어도 그 위로 펼쳐진 여름이

외상장부처럼 펄럭이던 눈부신 하늘이, 외려 맑아서 우리의 삶에,

아름다운 그녀에게 즐겁게 외상지며 살았었는데

 

내가 외상졌던 그녀의 입술

해변처럼 부드러웠던 그녀의 허리

걸어 들어갈수록 자꾸만 길을 잃던 그녀의 검은 숲 속

그녀의 숲 속에서 길을 잃던 밤이면

달빛은 활처럼 내 온몸으로 쏟아지고

그녀의 목소리는 리라 소리처럼 아름답게 들려왔건만

내가 외상졌던 그 세월은 어느 시간의 뒷골목에

그녀를 한 잎의 여자로 감춰두고 있는지

 

옥타비오 빠스를 읽다가 문득 서러워지는 행간의 오후

조심성 없는 바람은 기억의 책갈피를 마구 펼쳐놓는데

내 아무리 바람 불어간들 이제는 가 닿을 수 없는, 오 옥탑 위의

옥탑 위의 빤스, 서럽게 펄럭이는

우리들 청춘의 아득한 깃발

 

그리하여 다시 서러운 건

물결처럼 밀려오는 서러움 같은 건

외상처럼 사랑을 구걸하던 청춘도 빛 바래어

이제는 사람들 모두 돌아간 기억의 해변에서

이리저리 밀리는 물결 위의 희미한 빛으로만 떠돈다는 것

떠도는 빛으로만 남아 있다는 것






박정대 1965년 강원도 정선에서 출생.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90년 《문학사상》에 <촛불의 미학>외 6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단편들』,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등이 있음. 김달진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을 수상.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 1914. 3. 13~1998. 4. 19)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라틴아메리카의 대표적인 문인이다

그가 다룬 가장 중요한 주제는 성적인 사랑과 예술적 창조성을 통해 실존적 고독을 극복하는 인간의 능력이었다.

80년대 세르반테스상 90년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새는 노래한다, 노래하는 것의

의미도 모르면서 노래한다

그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목청의 떨림뿐이다.   - 옥타비오 파스<수사학>일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