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내안의

흐드려지다 / 박이화

그믐애 2014. 12. 24. 08:30

 

 

 

흐드러지다 2/ 박이화

 

 

간밤

그 거친 비바람에도

꽃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도리어 화사하다

 

아직 때가 안 되어서란다

 

수분(受粉)이 안 된 꽃은

젖 먹은 힘을 다해

그러니까 죽을힘을 다해

악착같이 가지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단다

 

그러나 으스러질 듯 나를 껴안고 있던 그대 팔이

잠들면서 맥없이 풀어지듯

때가 되면 저 난만한 꽃잎도 시나브로 가지를 떠난단다

아무도 막을 수 없는

눈꺼풀 스르르 내려앉는 그 천만근의 힘으로

 

때가 되어 떠나는 일 그러하듯

때가 되어 꽃피는 힘 그 또한

누가 말릴 수 있을까?

 

때가 되어

그대 앞에 만판 흐드러진

내 마흔 봄날도 분명 그러했을 터

 

- 시집『흐드러지다』(천년의 시작,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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